애넌데일에서 31년간 세탁소를 꾸린 할머니
1947 · 버지니아주 애넌데일
교회 친구가 이런 것을 만들었다기에 나도 해 봅니다. 우리 손주들이 한국말이 서툴러도 번역이 된다고 하니, 할머니 이야기를 여기 남겨 둡니다.
"망한 자리에서도 아이는 자랍니다."
마무리와 새로운 시작 · 집과 환대
비행기에서 운 것은 무서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가 싸 주신 김치를 김포 공항에서 다 버리고 온 것이 그제야 생각나서였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제일 큰일인 줄 알았지요. 살아 보니 이민이라는 것은 큰 결심 한 번이 아니라 작은 이별 만 번입니다. 그래도 갑니다. 가서, 새 땅에서 김치를 새로 담그면 됩니다. 맛이 좀 다르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그 땅의 우리 집 맛이 되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다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담그는 법만 가져가면 됩니다.
돈 · 일과 소명
세탁소는 현금 장사입니다. 삼십일 년 동안 아침마다 금고를 열면서 배웠습니다. 돈은 거짓말을 안 합니다. 사람이 돈을 가지고 거짓말을 하지요. 장부는 한글로 적었어도 숫자는 똑바로 적었습니다. 번 것보다 적게 쓰고, 남는 것은 아이들 학비로 보내고, 금고가 비는 날도 부끄러운 적은 없었습니다. 돈이 없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돈에 대해 거짓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자녀 키우기 · 가족 갈등과 화해
딸아이는 변호사가 되었고, 한국말을 잊었습니다. 전화를 하면 저는 한국말로 묻고 아이는 영어로 대답합니다. 삼십 년을 그렇게 했습니다. 옛날에는 그것이 서러웠는데 지금은 압니다. 그 영어 대답 속에 효도가 들어 있다는 것을요. 말이 반만 통해도 마음이 다 통하는 수가 있고, 말이 다 통해도 마음이 반도 안 통하는 수가 있습니다. 두 언어 사이에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 반쪽 대화를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느 나라 말로 하든, 사랑한다는 말은 다 들립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아이가 어느 나라 말로 대답하는지 보지 말고, 대답한다는 것을 보세요.
교육과 배움 · 실패와 좌절
마흔 살에 교회 지하실에서 영어를 배웠습니다. 손님들에게 'ready Thursday' 말고 더 좋은 말을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처음에는 창피했습니다. 마흔 살 먹은 여자가 ABC를 쓰고 앉아 있으니까요. 그런데 배우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창피한 사람은 시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창피해서 시작도 못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요. 무엇이든 늦었다 싶을 때가 제일 빠른 때입니다. 지금 저는 그 교실에서 가르칩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창피함은 교실 문 앞까지만 따라옵니다.
집과 환대 · 우정과 공동체
영어를 못 하던 시절에도 저는 사람을 먹였습니다. 세탁소 뒷방에서 김밥을 싸서 옆 가게 청년에게, 우체부에게, 말 한마디 못 나누는 사람들에게 건넸습니다. 그 사람들이 사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저의 친구입니다. 말이 안 통해도 밥은 통합니다. 낯선 사람, 외로워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묻지 말고 먼저 먹이세요. 무슨 말이 필요했는지는 밥을 다 먹고 나면 서로 알게 됩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묻지 말고 먼저 먹이세요.
버지니아에서 사십 년 넘게 김장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배추를 못 구해서 양배추로 담갔는데, 그 맛은 잊어버리기로 약속합시다. 지금은 십일월 마지막 토요일에 차고에서 합니다. 딸은 변호사라 바쁘다면서 와서 제일 오래 있다 가고, 손녀는 고무장갑을 끼고 사진부터 찍습니다. 배추 마흔 포기, 다섯 식구, 입은 쉬지 않습니다. 김치는 핑계입니다. 김장은 일 년에 한 번, 식구가 식구인 것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A letter
"정은 말이 아니라 손에 들려 보내는 것이다."
대단한 사람으로 기억하지 마세요. 그냥, 셔츠를 맡기면 목요일에는 틀림없이 되어 있던 집. 배가 고프면 뒷방에서 김밥이 나오던 집. 그 정도면 한 인생으로 충분합니다. 나를 기억하고 싶거든 누구에게든 따뜻한 밥 한 끼 먹이세요. 그것이 나입니다.
"나를 기억하고 싶거든 누구에게든 따뜻한 밥 한 끼 먹이세요."